김생사지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 옵니다.
저 멀리 강 건너 아파트 불 빛 만이 비추고 있습니다.
깨진 기와 몇장만이 과거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변은 사과밭 입니다.
바로 옆으로는 새로운 도로 건설이 한창 입니다.
하늘의 달은 오늘도 무심히 지나갑니다.
허허로운 벌판에 그나마 비석 주변으로 잔디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을 강바람이 귓가를 부드럽게 스치고 있습니다.
시 대 : 통일신라
유 형 : 사지
지 정 : 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 제114호
지정일자 : 2000. 12. 22
소재지 :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65-5
신라의 명필인 김생은 성덕왕 10년(711) 에 가난하고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였고 원성왕 7년(791) 80세까지 붓잡기를 쉬지 않았다.
이 사지는 김생이 만년에 창건한 사찰터로 주변에 장대석이 많고 석탑재와 와편, 도자기편이 산재해 있어 이곳을 "와당밭"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와전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김생사지는 『수산집』의 김생사중수기와 "신중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하여 북진애-예성의 북쪽나루- 즉 현 위치의 김생사에서 두타행을 닦았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수년전까지 있었던 고와가의 본체 용마루에서 『건융을미(1775)』망와 4점과 『성상오십일년을미 충청도 충주』의 암기와가 발견되었다.
수습된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근래까지 조선시대 고가터가 남아 있으며 1979년 당시 두채의 건물이 "ㄷ"형태로 있었다. 절터의 서쪽 강가에는 김생이 쌓았다는 김생제방이 있는데 이 제방은 강물에 의한 토량 침식을 예방, 사지의 평탄대지를 조성하기 위해 자연석으로 쌓았던 것으로 40~50cm정도의 길이에 높이 3~4m규모로 남아있으나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물에 잠겨 자취를 찾기 힘들다
김생은...
참조: http://www.cj100.net/tour/main/

때는 신라 경덕왕 10년이었다.
서기 711년에 탄생하여 791년(원성왕7년)에 향년 88수(壽)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릴 때부터 글씨를 쓰기 시작하여 다른 예도(藝道)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었고 80평생을 오로지 붓만을 잡아 천하 명필의 유작을 남겼다.
언제 어느 때 눈을 감을지 모르는 노경(老境)에서도 다른 일에는 기진맥진하다가도 붓을 잡으면 어디서 힘이 나는지 쉴 줄을 모르고 태연히 글을 썼었던 공은 진서(眞書)와 예서(?書), 행서(行書)와 초서(草書)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지금도 왕왕 그 필적(금석문;金石文)이 있어서 학자들은 보배로 간직하여 전한다고 한다.
고려 학사(學士) 홍권(洪權)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그 나라 한림시초(翰林侍招)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글씨를 보였더니 두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 글씨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가 아니냐? (김생의 글씨를 보자 자기 나라의 명필인 왕희지의 글씨로 착각하고) 이 귀한 명필의 보물을 오늘 여기서 대할 줄이야 하며 감탄하는 것을 보고 학사는 어이가 없어 하다가 사실을 알렸다.
이 글씨는 왕 희지의 글씨가 아니고 우리나라 신라 사람인 명필 김 생의 글씨다 라고 말했으나 두 사람은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천하의 왕 희지를 제외하고 이 같은 명필이 어디 있을 수 있느냐고 하였다.
[청량한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흰기러기, 흰기러기야 훤사(暄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挑花)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고기 잡는 이가 알까 하노라.]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청량산을 두고 읊은 퇴계 선생이 쓰신 시이다. [六六峰]이란 읊조르기 편의한 시구어로써 12봉을 일컬음인데 (愼霽 周世鵬 선생이 명명하였다고 함) 자연경관 이 절정을 이루어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어졌다.
이 명승지 영산 중에는 많은 사암(寺庵)이 있어 전해져 오고 있고, 원효대사의 유적인 원효정, 고운(孤雲;최치원)선생의 유적인 치원봉, 고운대(孤雲臺), 신라 서성 김생이 10년간이나 서도를 닦던 김생굴, 의상대사의 유적인 의상봉, 퇴계선생이 수도한 오산당(五山堂),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한 왕궁사(王宮寺) 밑 오마대(五馬臺) 청량산의 최고봉인 장인봉(丈人峰), 밖으로는 외장인봉, 선학봉, 안으로는 자란봉(紫鸞峰), 자소봉(紫 峰), 탁필봉(卓筆峰), 연적봉(硯滴峰) 등 수많은 명승 유적들을 간직한 이 청량산, 듣기만 해도 곧 신선이 되는 기분인데 입산하면 오죽하랴.... "연적봉물을 따서 탁필봉 붓을 삼고 금강역사 힘을 얻어 일필휘지 써 봤으면,,," 하는 생각 뭉클 나는구나.
[단군영정에 얽힌 전설]
경남 밀양 영남루 맞은편 천진전(또 강화도 마니산)에 모셔져 있는 이 두 곳의 단군영정전에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 단군영정의 유래는 지금까지 전설로만 전해져 오고 있어 필지가 이 전설이 시대 변천과정에서 망각될까 염려하여 기록해 보고자 한다.
김생은 우리민족의 시조가 누구이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다. 시조가 단군임은 들어서 알았지만 그 모습이 어떠할까?
중국의 큰 성인인 공자의 상이 있고 석가모니불도 상이 있다.
그런데 어찌 우리 시조는 단군이라고만 하여 이름은 전하고 상은 전하지 않는 것인가? 이래서야 먼 훗날 우리 민족의 구심점을 어찌 어디에서 구하랴. 김생은 차츰 머리가 더 무거웠고 심신이 곤하였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생각이 궁극에 미치자 마침내는 손수 단군의 상을 그리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매일같이 목욕재개하고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하얀 종이 위에 초상화의 기초 본을 뜨기 시작하였다. 한장, 두장, 열장, 스무장......그러던 중 김생의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무아지경에서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김생의 앞에 신선 같은 도인이 나타났다.
그 도인은 말하기를 "김생. 그대는 나를 그리기 위해 이토록 정성을 기울이고 있구나. 자 나를 봐라. 똑똑히 보고 기억하라" 김생은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붓을 잡았다. 몽중 영상을 되살려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열심히 그렸다. 한장을 그려놓고 벽에 걸어보니 잘 그려졌으나 의심이 갔다. 과연 이 그림이 꿈에 나타난 단군의 상인가? 이 한 장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또 그려보자. 두장을 그렸다. 똑같이 그려졌다. 석장, 넉장, 다섯장.....열장을 그렸다. 다 비슷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한 장만 더 그려보자.
그리하여 도합 열 한 장을 그렸다. 다 함께 걸어두고 자세히 보아도 열 한 장 모두가 꼭 같은 상이었다. 이제는 꿈에 본 상이 그대로 다 나타났는가 보다. 그제서야 믿고 자신도 이 이상 더 할 수는 없겠구나 하고 붓을 놓았다. 그리하여 김생은 단군의 상을 완성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은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석단목 스님은 과연 누구일까? 당시만 해도 모든 문화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 생활하던 시대가 아니던가? 그런 가운데에서 글씨는 더욱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백월비(白月碑)를 세우는 과정에서 비문의 글씨를 중국의 명필 가운데에서 구하지 않고 이미 타계하신 신라 김생의 글씨를 한자 한자 모아 집자(集字)를 해서 비문을 각한 것은 위와 같은 연유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
[김생작품]
금가면유허비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름 높은 서도가들이 수없이 나타났지만 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분으로 우선 꼽을 수 있는 분은 신라의 명필 김생과 조선후기의 김정희 선생이다.
이 두분이야말로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이라 불릴 정도의 서성(書聖)들로 그 취향과 태세는 고금이 서로 달랐다해도 두분이 이룩한 바탕은 하나였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성 김생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간단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을 뿐이다.이리하여 후에 이인로의 파한집에서도 김생의 글씨가 신묘하다 하여 오십 칠종의 제가체세를 멀리 뛰어 넘었다 한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신라, 고려 등을 통틀어 명필가 넷을 신품사현으로 꼽는데 김생을 제일로 쳤으며 원의 조맹도도 창림사 비발문에서 신라승 김생이 쓴 이 비문이 당인의 명각보다도 뛰어나다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성현의 용제총화에서 모두 김생을 제일로 치고 원교 이광수는 "필쾌"에서 동국 필법은 신라 김생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드디어 홍양호는 김생이 동방서가의 시조라고까지 일컫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 같이 김생이 중국의 서성 왕희지 필체의 신수를 얻어 오히려 그를 능가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김생의 진짜 필적으로 알려진 백율사의 석동기와 고려 초에 승단목이 김생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의 글씨를 보면 극도의 귀족적 세련미가 위축되어 유려전아(流麗典雅) 하기 만한 왕희지체보다 한결 더 골기가 승하여 청경탈속한 일취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고유미감이 가미로부터 이루어진 고유의 색이라 할 것인바 과연 김생은 동방의 서가의 시조로 보아 손색없는 명필가라 하겠다.
동국여지승람 충주조에 김생이 두타행을 닦으며 이 절에서 살았으므로 그로 인해 이름을 삼았다고 하였으니 김생사가 김생이 기거하던 절이었음은 틀림없겠는데 안동문필산은 김생이 글씨를 배우던 곳이라는 각주가 붙어있어 김생이 경주에 가까운 안동에 가서 글씨를 배우고 이로 이름을 얻은 후에 고향인 이곳 충주로 와서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절이 김생사였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문화공보부는 선현추모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김생사지에 김생의 유필을 집자보존 하려는 뜻을 세우고 충북으로 하여금 그를 집행케 하니 이로 말미암은 기념집자비가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인연 필생의 도리가 천백세후에 때를 만나 성취케 되니 가히 성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전유암산가서
김생(행서) : 통일신라 8세기, 탁본 22.5㎝, 개인소장
그가 쓴 것으로 정해지는 경주의 창림사비인데 이 비는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고 그 탁본도 전하지 않는다. 법첩(法帖)으로 전하는 것은 해동명적(海東名迹)과 대동서법(大東書法)가운데에 들어있고 단독으로 된 서첩은 이 전유암첩 뿐이다.
처음에〈산가서(山家序)〉5엽이 있고 뒤에 5언시 1편이 붙어있는 소자 행초(小字行初)이다. 말미에 보덕사 김생서(報德寺 金生書)라는 자서가 있다.
글씨의 원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게 불만스럽기는 하나 이런 것이라도 남아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낭공비(朗空碑) "해동명적"에 실린 행서 [당시(唐詩)] "대동서법"에 실린 대자(大字) "麗山○○詩 등을 종합 연구하면 김생의 면모를 알게 될 것이다.
백월서운탑비
신라 효공왕과 신덕왕의 국사 낭공대사(朗空大師)의 탑의 명을 새긴 비이다. 김생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이며, 봉화군 태자산의 태자사에 세운 것을 뒤에 영주군으로 옮겨졌음. 현재 경복궁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155cm이고 넓이는 97cm이며 두께는 24.2cm이다.
기록된 바 없어 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으나 그 후 조선조에 와서 영주군 군청사 앞으로 옮겨 세웠다.
근대에 와서 또 세 번째로 자리를 옮긴 곳이 현재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서체는 행서이고 글자의 크기는 직경 2.1~3.0cm이다.

[김생과왕희지서법론]
왕희지
해서는 대체적으로 직선적으로나 쓰이나 행서는 곡선이 많다. 의의 경우 해서에 가까우면서 둥근 맛을 가미하여 청초미를 주고 있다. 특히 종획은 허획을 작게 실획으로 이끌어낸 것이
특징이다.
김생
1획과 2획을 왕과는 달리 수평으로 하여 안정감을 주고 종획을 올렸다가 좌로 끌어 당긴 것이 율동미를 더해 준다.
왕희지
행서는 점과 획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각각 독립되어진 획이나 그 필맥은 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유연한 동태미를 나타낸다.
김생
글자의 중심을 좌측으로 이동시켜 여유로운 공간 구성을 하였다.
왕희지
1획과 2으로 이어 내리는 전절의 기법은 유려한 맛을 주며, 종획의 넉넉한 공간 구성이 청경하여 여유로움을 준다.
김생
행서에 가까운 질박한 모습으로 필력이 강경하며, 1획의 수평적인 기법에 종획을 짧게 좌측으로 찍어낸 것이 온건하면서 단정하다.
왕희지
1획을 앙세로 끌어 올린 다음 2획의 삐침을 거의 세우고 3획을 수평에 가깝게 찍어 예각을 살려 강직한 맛을 나타내었다.
김생
1획을 王과는 달리 부세로 취하여 중후하게 곡선미를 나타내며, 왕보다 2획을 짧게 하면서 종획을 더 곡선으로 이끌었다가 예각을 주어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왕희지
전절의 유려한 기법에 둥근 맛을 나타내며, 우측으로 중심을 이동시켜 곡선미의 변화를 추구하여 여백의 미를 보여 준다.
김생
역시 王과 거의 흡사한 기법으로 우측으로 중심을 당겨서 자연미를 준다. 이러한 것은 서가의 고고한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예술성이다.
왕희지
왕희지 부등 분할의 대표적인 결구법을 구사한 것으로 종획을 파격적으로 우측으로 이동하여 중심을 변화하였다. 때문에 2획과 3획의 연결이 과감한 표현으로 대담성을 짐작케 한
결구의 아름다움이다.
김생
좌우가 비대칭되어 있으나 王보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1획의 기필은 앞의 글자와 연속성을 보인 것으로 2획이 단폐로 표현 되고, 종획 또한 머물러 마무리하여 생동감을 준다.
왕희지
1획과 2획 사이의 공간을 매우 과감하게 크게 하여 당당함과 그 필세가 종획까지 이어져 전절의 유려함을 나타내어 동태미를 준다.
김생
해서의 중후한 골격을 유지하면서 王보다 정방혀의 형태를 취하여 둥글 게 유연미를 구사하여 단아한 모습이다.
왕희지
글자의 중심을 뒤로 이동시키면서 종획의 수필 부분을 우측으로 다시 당겨들임은 역학적 관계로 균형을 잡아 조화미를 보여 준다.
김생
역시 王의 경우와 같은 결구이나, 원필의 필법을 구사하여 중후한 정태미로 표현하였다.
왕희지
획에서 3획까지 좌측의 공간을 넓게 하여 도약하는 듯한 율동미를 주며, 특히 2획과 3획으로 이어지는 속도감은 시원하게 청아한 맛을 더해 준다.
김생
王보다 해서에 가까운 질박함을 보여 준다. 균등한 분할로 공간 구성을 하여 경직된 듯이 단아한 모습이다
왕희지
해서는 점획을 약간의 생략법을 생략하여 그 필의를 전달한다. 이 때 고법의 약속을 지켜야 하며, 어느 개인의 생략법은 인정되지 않는다. 1획과 종획을 곧게 하여 당당함을 보여주며
중간의 획은 필순을 변화시켜 과감하고 자연스럽게 생략법으로 표현하였다.
김생
중간의 생략법은 王의 경우와 같으나 첫획을 향세를 하고 종획을 낮게 구사하여 이어지는 맛이 한층 더 안정되며 소박한 맛을 준다.
왕희지
매우 날카로운 전절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종획을 우측으로 밀어내듯이 강직하게 표현하여 긴장미를 더해준다.
김생
王의 경우와는 달리 상하, 좌우를 폭넓게 연속 시켜서 확트인 공간 구성미가 유장한 결구미로 돋보이는 점이다.
왕희지
상부를 짧게 당겨서 긴장미를 주고 하부의 '발'을 넓게 뻗어주어 수덕하면서 안정감을 나타내어 생동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김생
王의 경우와는 달리 상하, 좌우를 폭넓게 연속 시켜서 확트인 공간 구성미가 유장한 결구미로 돋보이는 점이다.
왕희지
1획의 전절을 약간 우로 당기며, 3획을 우측으로 길 게 이끌어내어 불균형의 조화미를 구사하였다.
김생
王의 경우와는 달리 정방형의 결구로 해서의 골격을 유지하고 종획의 끝처리 만을 연속시켰다. 엄숙하고 한가로운 단정함을 보여준다.
왕희지
점획의 생략법을 구사하여 직사각형의 구도 안에 모든 획을 연속시키므로서 긴장미가 넘치는 변화를 추구하였다.
김생
점획의 생략법은 王과 같으나, 정방형의 구도를 취한 것이 느긋한 결구이다. 또 원필의 탄력성은 아늑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왕희지
점획의 생략법을 구사하여 직사각형의 구도 안에 모든 획을 연속시키므로서 긴장미가 넘치는 변화를 추구하였다.
김생
점획의 생략법은 王과 같으나, 정방형의 구도를 취한 것이 느긋한 결구이다. 또 원필의 탄력성은 아늑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왕희지
상부는 가볍게 하여 여유로움을 주며, 하부는 초서의 필법으로 생략하면서 조밀하게 연속시켜 아주 빠른 속도감을 보여준다.
김생
王의 경우와는 달리 해서의 서법을 구사하여 상부를 중후하게 구사하고, 하부 역시 해서에 가까운 무게감을 실어 웅장함을 표현하였다.
왕희지
좌우를 대칭으로 결구를 하였고, 전체의 획을 연속시켜서 단정하면서도 수려한 맛을 표현하여 유장한 생명력을 표현하였다.
김생
하부의 중심을 우측으로 당겨서 조밀한 긴장미를 더해 주고, 좌측의 공간 구성을 극대화 시킨 것이 돋보인다. 비대칭의 결구미가 신묘함을 더해준다.
왕희지
좌우를 대칭으로 결구를 하였고, 전체의 획을 연속시켜서 단정하면서도 수려한 맛을 표현하여 유장한 생명력을 표현하였다.
김생
하부의 중심을 우측으로 당겨서 조밀한 긴장미를 더해 주고, 좌측의 공간 구성을 극대화 시킨 것이 돋보인다. 비대칭의 결구미가 신묘함을 더해준다.
왕희지
편과 방의 사이를 넓게 띄우고 방의 횡획의 하나를 생략하여 긴밀하게 하였다. 또 종획을 길게 현침으로 이끌어 상부의 긴장감을 하부에서 수려하게 구사한 결구미이다.
김생
횡획은 수평으로 종획은 나란하게 하여 균등하게 분할시켰는데 오히려 초서의 서법과 같은 유연미가 돋보인다.
왕희지
편의 두획을 짧고 균등하게 이은 다음 방의 첫획을 높이 올리면서 종획을 전절시킨 것이 매우 수려하다.
김생
1획을 길게 하고 2획을 짧게 한 다음 쳐올린 다음 종획을 3획보다 올린 것이 王과 다른 점이다.
왕희지
편과 방을 나란하고 넉넉한 공간 구성에 종획을 긴 현침을 구사하여 유려한 여운을 두어 여백미를 표현하였다.
김생
편과 방을 균등한 위치로 병행하여 단아한 맛을 나타냈다. 그러나 시와 갑이 너무 넓은 결구가 집자할 당시 서로 다른 위치의 글자에서 합쳐진 것으로 보여진다.
왕희지
편의 1획과 2획의 공간을 과감히 띄워 길게 하고, 방은 작게 연결하여 편보다 낮게 결구되어진 것이 특징이다.
김생
편의 4획에서 王은 전절을 겹친 반면에 김은 띄워서 차이를 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위의 '神' 字 같이 집자상의 부조화를 보여 준다.
왕희지
편을 가늘고 길게 늘어뜨리고, 방의 첫획을 매우 높이 끌어 올려 마치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듯한 자의를 연상케 한다.
김생
편과 방을 다른 어느 글자 보다 많이 띄워 넓은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듯한 자의이다. 그러나 집자상의 부조화가 더 적당하다고 보여진다.
왕희지
'물수 변'을 향세로 취한 다음 '法'의 중간을 짧게 전절시켜 상하의 긴장미를 더해 주고
있다.
김생
'물수 변'을 배세로 한 것이 왕과 다르며, 또 '法'의 전체에 전절을 매우 과감하게 하여 중후한 맛을 표현하였다.
왕희지
상부의 복잡하게 조밀되어진 긴장미를 종획에서 '"'를 직선으로 표현하여 안정감으로 풀어 주는 동태미를 볼 수 있다.
김생
王과는 다르게 상부를 단정하게 한 다음 '"'를 곡선으로 율동감있게 연결시켜 유연하게 생동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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