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없는 밴츠- 김용원,1993
<책 머리에>
나는 어려서부터 공직자의 길을 꿈꾸어왔다. 운좋게도 대학교 재학중일 때 사법시험에 합격한 나는 3년간의 육군 검찰관 생활을 마치고, 1983년 9월 1일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되어 검사생활을 시작하였다.
나는 사건다운 사건을 찾아내어 수사하는 국민의 검사가 되고 싶었으므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서울지검에서 부산지검 울산지청으로, 그후 부산지검을 거쳐 수원지검에서 사직할 때까지 몇 안되는 인지사건이나마 밤을 새워가며 수사했었고, 나에게 배당된 송치사건들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았었다. 그러나 퇴직한 지금에 와서는 좀더 일에만 전념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부산에 근무할 때 검사장이 나에게 '브레이크 없는 벤츠'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내가 사건수사는 아주 잘 하는데 한번 시작하면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모르고 자꾸만 앞으로 나가기만 한다면서 그런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나는 사실 '브레이크 없는 벤츠'가 아니었고 그 별명을 불만스러워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 검찰에는 '브레이크 없는 벤츠'들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 싶다. 이 책의 제목은 그런 염원에서 붙여졌다.
-중략-
나는 검찰에서 많은 훌륭한 검사들을 만났다. 특히 젊은 검사들은 대부분 양심적이고 일에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국가조직으로서의 우리 검찰은 정치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하였고, 출세를 위하여 많은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검사들만이 검찰의 지휘부에 오르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과 집단이 변화되어야 하며, 검찰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우리 검찰은 하루빨리 정치검찰의 때를 벗어던지고 국민검찰의 모습을 갖추어 가야 한다.
-중략-
1993년 7월
김용원
국민검찰시대를 열자면
우리 사회는 총체적으로 뿌리 깊숙히 부패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한단계 더 도약하자면 이 부패구조가 청산되어야만 한다. 부패구조의 청산을 위해서는 정치인 집단, 공무원 집단, 기업인 집단과 같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제집단들의 자정 노력과 검찰이나 감사원. 국세청 같은 국가기관들의 올바른 권한행사가 필수적이다.
검찰은 지금과 같은 모습과 자세로는 부패구조의 청산이라는 과업을 수행할 수 없다. 지금의 검찰은 고작해야 이 사회에 만연된 부패구조와 한통속에 지나지 않는다. 검찰은 그 면모를 일신해야만 한다. 검찰간부 몇 명 정도가 비리에 관련되었다하여 검찰에서 내쫒기는 것으로는 검찰의 면모가 전혀 일신되지 않는다. 지금의 검찰간부들은 대부분 서로 닮은꼴들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자세가 올바르고 청렴한 검사, 수사활동에 강한 의욕이 있고 능력을 발휘하는 검사를 중용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검찰인사에서는 훌륭한 장인을 가진 검사, 말 잘 듣고 아부 잘하는 눈치 빠른 검사, 고작해야 기획 및 행정능력이 뛰어난 검사가 발탁되고 중용되어왔다. 수사활동에 집착하는 검사는 경계와 외면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검찰의 지휘부, 특히 일선 지방검찰청 검사장에는 외부인사들이 과감히 기용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거의 예외 없이 검찰 내부에서 승진한 검사가 일선 검사장이나 검찰총장 등 핵심 간부직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승진 인사 관행은 검사들을 철저하게 출세지향적이고 권력순응적으로 만들었다. 이제야말로 검찰총장이나 검사장들을 과감하게 재야 법조인이나 법관 가운데에서 기용함으로써 검찰 내부에 만연된 출세하고 싶은 검사들이 아니라 수사활동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진 검사들의 집단이 될 수 있다.
검찰은 더 이상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검찰조직은 군대조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검찰은 지금까지 군대 이상의 일사불란성을 강조해 왔다.
군대는 고도로 일원화된 적과의 전쟁을 담당하는 조직이므로 핵심지휘부의 명령이 일사불란하게 하달되지 않는다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단위부대들이 각자 제멋대로 전투행위를 해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군에 일사불란한 지휘명령체계가 확립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검찰은 원래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범죄행위의 척결이 그 임무이다. 반사회적인 집단의 난동이나 소요를 진압하는 일은 경찰이나 군대의 책임이지 검찰의 책임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기준에 의한 형벌권의 행사는 물론 긴요한 일이지만, 이것은 철통 같은 상명하복의 지휘체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방검찰청간의 유기적인 협조체제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지금까지 검찰에 일원화된 지휘계통이 강조된 것은 정치권력자, 그것도 국민적 정통성이 없는 집권자가 검찰을 수족처럼 부리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비민주적 집권자는 민주적 반정부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검찰조직 전체를 집권자의 명령 한 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순종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전국의 어느 구석에 있는 반정부인사이든 간에 집권자가 잡아 족치라면 검찰은 즉각 그대로 따를 수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자연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사불란한 검찰조직은 그러나 권력의 주구 노릇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 지휘체계는 한없이 남용되어 지휘체계의 상층부에 빌붙을 능력이 있거나 연줄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어진간히 미련한 사고를 저지르거나 불운하지 않는 이상 중대한 범법행위를 저지르고도 형사상의 면책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저지르는 검은 돈 거래는 저절로 불거진 때를 제외하고는 검찰의 공격을 받지 않았고 검찰의 지휘부는 그 공격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검은 돈의 떡고물을 향유해 왔다.
검찰은 일선 지방검찰청간의 유기적인 협조체제에 의해서 모든 정상적인 기능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다. 지방검찰청의 검사들로 하여금 범죄자의 면면이 아니라 오로지 범죄행위의 경중에 따라 범죄자들을 처단하게 만들기 위하여는 사명감이 있는 검사장이 필요할 뿐이지 검찰총장의 지휘를 기다리는 검사장은 필요하지 않다. 사명감있는 일선 검사장들은 범죄척결을 위해 서로간의 유기적 협조체제를 적극 환영할 것이고, 이러한 협조체제를 갖춘 검찰은 비록 전국적인 범죄조직이 출현하더라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검찰은 정치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정치권력도 더 이상 검찰을 이용하여 정치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검찰은 스스로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검찰총장쯤 되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올 각오로 정치권력자들을 상대해야 하며, 후배검사들은 선배검사들에 대한 존경의 척도를 우선 정치권력을 향한 그들의 자세에서 찾아야 한다. 정치권력은 검찰로 하여금 범죄행위 척결에 전념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장관 자리 같은 다음 자리를 노리는 권력 해바라기를 검찰총장에 임명해서는 안된다.
검찰은 의미있는 특별수사활동에 전념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검찰은 사실상 공안검찰이었다. 파행적 정치권력이 모든 행정을 지배하는 바람에 검찰 역시 그 정치권력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기관, 즉 공안검찰로 기능해 왔다.
대검찰청의 중앙수사부라는 이름도 거창한 기구는 끈 떨어진 왕년의 거물을 잡거나 때때로 제풀어 불거터지는 비리사건들을 가급적 최단시일내에 청소하는 일에 동원되었을 뿐이다. 지방검찰청마다 설치되어 있는 특별수사부는 말단공무원들의 독직행위나 상습도박, 가짜 식품, 음란퇴폐 따위의 저급한 범죄행위들을 색출하는 일을 하고는 으스대었다.
검찰의 특별수사활동은 현재의 거물들이 저지르는 구조적인 비리행위를 색출, 처단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 고위 정치인 또는 공직자, 대기업가, 기타 지도층 인사들이 남 몰래 저지르는 검은 돈 거래, 대규모 탈세 등이 검찰 특별수사활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외의 대다수 범죄사건들은 경찰의 몫이 되어야 한다. 검찰이나 경찰이 똑같은 수사활도을 하게 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비효율적인 중복배치에 불과하다.
검찰의 수사활동은 무한계여야 한다. 지금까지의 검찰수사는 속전속결식이었다. 뭘 하나 시작하면 수일내로 후다닥 마무리하고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검찰은 구조적인 비리를 발견하면 몇 달이 걸리든 철저하게 추적하여 누가 범죄자로 밝혀지든 한계없이 처단해야 한다. 중범죄자로 하여금 수일간의 소나기식 수사만 피하면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특별수사활동은 부패구조의 청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검찰은 특별수사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특별수사의 능력이 있는 검사를 찾아내어 수사기술을 지도하고, 장기간 지속적으로 특별수사활동에 전념하게 해야 한다. 수사 능력은 경험에 의해서만 길러진다. 지금처럼 고작해야 삼사년 정도 특별수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검사들로는 난마처럼 얽혀 있는 구조적인 비리를 파헤칠 수 없다.
검찰은 청탁과 압력에 초연해야 한다. 지금까지 검찰의 간부들은 청탁과 압력의 주체이거나 그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하여왔다. 그리하여 검찰은 언제나 가진 자들의 편이 되었고 이 사회의 부패구조를 심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이제 검찰의 간부들은 후배들에게 범죄행위의 경중을 평가하는 안목과 수사기술을 지도하는 데에만 열중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검찰은 국민을 위한 검찰, 즉 국민검찰로 거듭나야만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조직이 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꼴로는 조만간 국민의 버림을 받고 이류, 삼류의 법조인 집단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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