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미륵리사지 입니다.
중원 미륵리 사지
사적 제317호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이 절터는 동쪽으로 하늘재, 서쪽으로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시대이래 조선시대 이전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불교 사찰의 역할 뿐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추적 기능을 다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미륵당' '미륵당초' '원주' '명창3년 대원사 주지 승 원명' 이라 적힌 기와들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절이름은 미륵대원으로, 미륵대원터는 본존불, 석등,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인 배치로서, 삼층석탑, 사각석등, 당간지주, 미완성 석불, 건물지, 돌거북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다른 절과 달리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절터가 전개되고 있는 것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추정된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석굴사원을 조성하고 불상을 세워, 동생인 덕성공주가 송계계곡으로 남향한 암벽에 새긴 마애불(덕주사 마애불)과 마주보게 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중원 미륵리사지는 고려초기의 석굴사원터로, 전실과 주실이 북향하는 특이한 배치이며, 주실에는 독립된 미륵불입상이 중앙에서 북향하여 멀리 월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미륵불입상과 석등,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단탑식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주실 앞에 전실이 있고, 전실 동쪽을 이어 큰 회랑지가 있으며, 회랑지에서 낮게 건물지 유구가 남아 있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뒤 목조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바,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 석굴의 돔형 지붕과는 다른 방식이나 근본적으로는 석굴암 석굴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석굴에는 본존불로 모셨던 석불입상이 있고, 석불벽에는 이 본존불을 장엄하기 위해 조각한 여래좌상, 삼불좌상 등이 있다.
사지에서 수습된 유물 가운데는 미륵당, 미륵당초, 원주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편이 있고, 이곳의 지명이 미륵리로 되어있는 점으로 미루어 석굴사원의 이름을 미륵대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절에 얽힌 전설로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에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입산하러 가던 길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 덕주사를 창건하여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였고, 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창건하고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전한다.
미륵리사지 귀부 입니다.
충주 미륵리사지 귀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는 길이 605cm, 높이 180cm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이다. 귀부의 배면은 거북등의 껍데기 모양을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의 등에는 비좌가 있으나 비신을 꽂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서 실제 비가 존재했는지는 의문이며 수차례 발굴조사 결과 비신을 찾지못했음을 볼 때 원래 석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거북 등에 표현된 2마리의 새끼 거북은 은근한 미소를 자아낸다.
미륵리사지 사각석등 입니다.
충주 미륵리사지 사각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이 석등은 기단석과 화사석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특히 평면 4각형이어서 일반적인 평면 8각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에는 큼직한 양련을, 각주석에는 화염모양의 안상을 새겼는데 고려시대 안상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화창은 원주형 석재 4개를 세워 옥개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상륜부는 사각 받침대만 남아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서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으로 고려수도인 개경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경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충주지역에 4각 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며 중원지역의 석조미술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석등이 같이 세워졌음은 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생각된다.
미륵리 5층석탑 입니다.
미륵리 오층석탑
지정번호: 보물 제95호
소재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높이 6m 단층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세웠으며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찰주가 남아있다. 기단은 자연석에 가까운 큼직한 4각형 돌로 우주, 탱주의 표현은 없다.
갑석은 매우 좁은 2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갑석 하면에는 형식적인 부연이 있으며 윗면은 경사가 뚜렷한데 중앙에 역시 형식적인 2단의 과임이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1층 옥개석이 2매일 뿐 옥신이나 다른 옥개석은 1매씩이다. 각층 옥개에는 옥신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우주를 모각하여 형식적인 느낌을 주며 각층의 체감비율도 고르지 않아 매우 소략해 보인다. 옥개석은 일바형 석탑의 비례를 따르지 않고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이 살아나지 못한 느낌이다. 옥개받침은 초층이 6단이고 2층이상은 5단씩이지만 처마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밑은 수평이며 낙수면의 경사가 매우 급하고 전각의 반전도 거의 없는 편이다. 옥개석 상면에는 낮은 괴임 1단씩을 모각하여 위층의 옥신석을 받치고 있는데 이 또한 형식적이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찰주가 남아 있는데 노반은 6층 옥개석으로 착각하리만큼 크고 복발은 조식이 없는 반구형이다. 정상에 찰주가 남아있는 것은 희귀한 예이다. 5단의 옥개석 받침과 직선의 추녀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낙수면의 급경사와 각 부 굄대의 형식화, 우주의 모각과 석재의 치석이 고르지 못한 점은 조형감각의 쇠퇴를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말까지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인 계립령로에 위치한 미륵사지에 석불입상, 석등, 오층석탑이 북쪽을 향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6m의 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1층 기단을 만든 후 돌들을 올려 놓았다.
바위 한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때, 지붕돌의 너비가 몸통에 비해 아주 좁으며 각 부분의 조성 기법이 형식적이고, 각 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감을 주고 있다.
미륵리사지와 함께 마의태가와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미륵리 석등 입니다.
미륵리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석불입상과 5층석탑 사이에 있는 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받침돌은 4각형으로 윗부분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의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양련을 조각하였다. 위로는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과 상륜부 받침을 두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미륵리 석등은 8각으로 지대석만 4각구조인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작품이다.
지대석과 연화대석은 1석으로 조석되었는데, 연판은 단엽 8판 복련이며 간주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8각석주이다.
상대석은 하면에 각형 1단을 마련하고 단엽 8판양련을 조각하고 판내는 화문을 장식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모두 화창을 뚫었고, 8각 개석은 낙수면의 합각이 뚜렷하다. 정상에는 8각의 옥개석 위에 연봉형의 장식을 하였다.
미륵리 석불입상 입니다.
미륵리 석불입상
지정: 보물 제96호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로,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서 있으며, 본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편이다.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흰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며, 거대한 원통에 가까운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높이 10.6m로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거불의 하나로 화강암 5매를 연결하여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고 머리에 팔각형의 판석 1매를 올려놓아 갓으로 삼고 있다. 양감이 없는 매우 위축된 신체에 비하여 얼굴은 평면적이기는 하나 꽤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낮은 육계와 나발, 초승달 같은 긴 눈썹, 직선적인 눈과 두꺼운 입술 등의 표현은 거불조성의 거창한 의욕에는 미치지 못하는 기량을 드러내어 불격이 효과적으로 표출되지 못하였다. 어깨는 좁으며 위축되었고 발 아래까지 같은 폭으로 이어져 신체는 입체감이 없는 원통형을 유지하고 있어 괴석같은 느낌을 더해준다. 팔 또한 형체만을 겨우 나타내었는데 가늘고 짧은 팔에 비해 가슴에 대고 있는 손은 비교적 커서 어색해 보인다. 왼손에는 연봉 같은 것을 들고 있으나 역시 형식적이고 수법 또한 졸렬하다. 통견의 법의는 몇 가닥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이불상이 보여주는 양식, 즉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 점이라든가 양감이 없는 원통형의 신체, 소략하고 생략된 옷주름의 표현 등은 충청도 지방에서 제작된 고려시대의 석불, 가령 관촉사 석조보상 입상,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안국사지 석불입상 등의 양식과 공통되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퇴화된 조각기술과 충청도 지방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이 불상이 석굴사원에 봉안되었던 주존불이라는 것이다. 석굴은 구조상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우리나라 석굴사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온달의 공기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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